맥주축제(Oktoberfest)는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지역에서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축제로 1810년에 시작되었다. Oktoberfest의 기원은 바이에른 왕국의 루드비히 1세 ( Ludwig I)와 테레시아(Theresia) 왕비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결혼식은 1810년 10월 12일에 마무리되었으며, 이후 다음 해부터 계속 축제가 열렸다. 처음에 이 축제는 말 경주와 같은 이벤트와 함께 열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모임으로 발전해 나갔다. 19세기에는 맥주 양조업자들이 축제에 참여하면서 맥주 텐트가 등장했고, 이후에는 텐트들이 크고 장식된 건물로 변모하면서 축제는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맥주 텐트에서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마시고 독일의 전통적인 음식과 함께 축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축제는 9월 말부터 약 16일 동안 진행되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년 참가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Oktoberfest는 독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맥주 문화와 독일의 대표적인 축제로 알려져 있다.
맥주 축제 (Oktoberfest)를 만든 루드비히 1세 ( Ludwig I)
1786년 슈트라스부르크 탄생한 루드비히 1세(Ludwig I )는 비텔스 박흐( Wittelsbach)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 이어 1825 년부터 1848년까지 바이에른왕국의 왕이었다. 1810년 왕세자로서 테레지아 공주와 결혼하여 옥토버페스트가 시작되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은 피나코텍 , 발할라 (Walhalla )와 같은 수많은 미술 컬렉션과 기념비적 건물을 세웠다. 1835년 12월에 개통된 뉘른베르크에서 Fürth까지의 독일 최초의 철도 노선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루드비히 1세는 혁신적인 국왕으로 그는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예술과 문화를 존중하고 지원하였으며, 뮌헨을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드비히 1세는 건축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통치 기간 동안 수도였던 뮌헨시안에 여러 건물 등을 건설했는데 테레지아(Teresia) 왕비와의 결혼 이후에도 여러 여성들과의 로맨틱한 연애로 유명한데 애인이 바뀔 때마다 건축양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님펜부르크 궁전(Schloss Nymphenburg)
옛 바이에른 왕국의 통치자였던 비텔스바흐 (Wittelsbach)가문의 여름 별궁이다. 궁전이름 님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에서 유래하는데, 궁전 내부의 "요정들을 거느린 여신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바이에른의 한 선제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역할을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권을 가진 독일어로 Kurfürst 라 하며 선거후라고도 한다. 선제후는 백작, 공작 그리고 대공과 같이 높은 직책을 맡았으며 서열상 신성로마제국의 왕 또는 황제 다음으로 높았다.)가 17세기에 그의 아들 탄생을 기념하여 짓도록 한 건물로 원래는 궁전이 아닌 이탈리아 식 저택이었으나 18세기 초에 궁전의 중앙에 해당되는 5층 저택 주변에 네 개의 파빌리온(Pavilion)을 더 지어 여러 개의 아케이드로 중앙의 저택과 연결시켜 점차 궁전으로 개조되었다. 본궁인 레지덴츠 궁전과 함께 비텔스바흐 (Wittelsbach) 왕가의 대표적인 궁전으로 뮌헨 방문 시 시내 외곽이지만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로 이 님펜부르크 성 (Schloss Nymphenburg)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퓌센의 백조성 (Neuschwanstein)을 축성한 루드비히 2세가 탄생했다. 루드비히 1세가 그의 조부인데 당시 1세대씩 건너 같은 이름을 황태자에게 명명하는 전통이 있었다. 루드비히 1세는 심한 여성편력으로 인해 결국 왕좌에서 내려왔고 , 아이러니하게도 손자인 루드비히 2세는 혼인을 거부해 왕손도 없었으며 꽃미남 배우, 신하들과 은둔생활을 하다가 왕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미인의 갤러리(Schönheitsgalerie)
님펜부르크 궁전의 수많은 방들 중 하나로, 루드비히 1세가 재위기간인 1825~1848년 사이에 온 나라의 여성들 중 미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난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그 그림들을 걸어놓은 방이다.
모델들은 루드비히 1세가 국가의 재정을 파탄내면서까지 열렬히 사랑했던 롤라 몬테즈(Lola Montez)를 비롯하여, 공주나 귀부인, 상인의 딸, 심지어 무희까지 여러 계층의 여성이었다. 이 초상화들은 모두 한 화가가 그렸는데, 베토벤의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인 슈틸러(1781~1858)이다.
무용수 롤라 몬테즈 (Lola Montez )
호색한이었던 루드비히 1세는 여러 애인을 둔 것으로 유명한데 그중 아일랜드 출신 무용가이자 배우인 롤라 몬테즈와의 염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스페인 출신의 무용가 신분으로 가장해 1846년에 바이에른 왕국에 온 롤라 몬테즈는 옥토버페스트( Oktoberfest)에서 춤을 추다가 루드비히 1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루드비히 1세가 그녀에게 가슴이 진짜냐고 물었고 롤라는 옷을 찢어서 가슴을 인증(...)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다큐멘터리나 영화 제작 시 빠지지 않는 소재이다. 얼마 안 가 25세의 롤라 몬테즈는 60세인 루드비히 1세의 애인이 되었고 루드비히 1세는 롤라 몬테즈에게 푹 빠져 그녀에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그는 롤라에게 뮌헨에 위치한 궁전에 살게 했고 그곳에서 롤라를 만났다. 또한 바이에른 국적을 부여하고 란츠펠트(Landsfeld) 여백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며, 막대한 연금을 롤라에게 주었다. 롤라의 영향력이 섭정에 까지 이르자 바이에른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롤라는 외국인인 데다 예의가 없으며 거리에서 시가를 피고 다닐 정도로 , 당시 시대상으로는 무례한 여성이라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또한 바이에른 국민들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왕비였던 테레지에 왕비를 동정했다. 그런데 왕이 계속 롤라에게 큰돈을 쓰며 바이에른 국적까지 준다고 하자 대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1847년과 1848년 뮌헨에서 일어난 이 모든 스캔들과 논쟁은 빠르게 인기 있는 연극과 극단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848년 2월에 루트비히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치인들과 루트비히 1세의 가족들마저 그에게 고개를 돌렸으며, 궁지에 몰린 루트비히 1세는 롤라 몬테즈의 바이에른 국적 부여를 취소하고 그녀를 추방했다. 그리고 3월 20일에 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 왕좌를 내주고 퇴위한다.
루드비히 1세를 만나기 전, 파리에서 무희로 활동할 당시에도 이미 음악가 리스트( List)를 비롯, 상류사회 남성들의 추앙을 받았던 롤라 몬텐츠는 바이에른 왕국에서 추방된 이후 여러 번 결혼을 했고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공연, 미용 컨설턴트 및 집필 활동을 하다가 40세의 나이로 1861년 미국 뉴욕에서 사망한다.
루드비히 1세가 옥토버 페스트 맥주축제를 만들지 않았다면 롤라 몬테츠를 만나지 않았을는지도...
추가 정보
호프브로이 (Hofbräuhaus )
뮌헨의 Hofbräuhaus 바이에른주에서 운영하는 기업으로 최고 감독 기관은 바이에른주 재무부이다. "Hof"는 "궁" "Bräuhaus"는 "양조장" 즉 궁중양조장을 뜻한다. Hofbräu는 옥토버페스트에서 테레지엔 광장( Theresienwiese)에 가장 큰 축제 천막을 설치하며 프랜차이즈로서 전 세계에 Hofbräuhauses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1591년 빌헬름 5세 공작에 의해 Alter Hof에서 Hofbräuhaus 가 설립되었고 1806년 Hofbräuhaus는 "Königliches Hofbräuhaus"가 되었다. 회사 로고는 Hofbräuhaus가 "Königliches Hofbräuhaus"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바이에른 왕국 시대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까지 "HB with crown"은 양조장의 회사 로고이며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 Hofbräu 맥주는 19세기에 이미 유럽 에 알려졌고 미국에도 수출되었다. 1802년부터 거의 독점적으로 흑맥주가 Hofbräuhaus에서 양조되었다. 1808년 공간상의 이유로 맥주 양조장은 마침내 Alter Hof에서 현재 위치인 Platzl에 있는 Hofbräuhaus로 이전했다. 1602년 뮌헨에서 밀 맥주 양조를 시작으로 1818년까지 흑맥주 양조는 Hofbräuhaus의 유일한 특권이었다.
19세기 초, 바이에른 왕족에게 엄청난 수입원이었던 호프브로이하우스에 점점 더 많은 손님이 찾아오자 도시의 양조업자와 뮌헨 음식점 주인의 눈에 가시가 된 호프브로이 하우스에 대한 소송이 1815년에 소송까지 제기되었다. 1848년 루드비히 1세가 퇴위하고 왕좌를 넘겨받은 막시밀리안 2세는 Hofbräuhaus로 인해 여전히 뮌헨 개인 양조장과 식당 주인의 소송에 직면했다. 따라서 잠시 동안 왕은 Hofbräuhaus를 사유화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분노의 폭풍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852년 막시밀리안 2세는 호프브로이하우스를 바이에른 주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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