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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독일여행코스추천 ,모차르트가 비운의 첫사랑과 아내를 만난 도시, 만하임( Mannheim)

by 독일곰팅이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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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Mannheim)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Baden-Württemberg)에 위치해 있고 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이다. 넥카강(Neckar)과 라인강(Rhein)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프랑크푸르트(Frankfurt)와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중간에 위치하며, 유럽 내에서 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만하임은 17세기에 설립된 도시로, 프리드리히 1세가 세운 바덴-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수도로 기능했다. 이후에는 유명한 음악 학교인 만하임 국립 음악대학교(Mannheim National University of Music)를 비롯하여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가 설계되어 있어 큰 대로는 이름이 있지만 보통 주소는  두 축을 상징하는  알파벳과 숫자로  표기된다. 처음에 이 도시의 주소를 보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 A4  2,  68159 ( 우편번호 )  Mannheim " 이렇게 표기된다 

모차르트가 만하임 체류시 미사에 참석했던 Jesuitenkirche St.Ignatius und Franz Xaver 성당

볼거리 

만하임 성( Barockschloss Mannheim )과 만하임 대학교 (Universität Mannheim)
만하임은 라인-넥카 지역의 중심지로, 많은 대학과 연구 기관이 있다 대표적으로 만하임 대학교가 있는데, 경제학, 경영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평판을 가지고 있다.

 

만하임 성( Barockschloss Mannheim )과 만하임 대학교 ( Universität Mannheim)

만하임의 관광 명소로 바로크 양식의 만하임 성(Barockschloss Mannheim )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대학교의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 교회 (Schloss kirche)와  일부 공간은 관람이 가능하다. 도시를 대표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물 저장고 탑 Wasserturm

물 저장고 탑 Wasserturm

만하임 도시 중심부에 있는  "Wasserturm"은 독일어로 물탑을 의미하는데 19세기말에 건축된 역사적인 건물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원형의 탑과 돔 형태의 상단 부분이 특징입니다. 이 건물은 당시의 수도 공급 시스템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물을 저장하고 분배하기 위한 탑 형태로 설계되었다. 이후에는 도시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유지되었다.

 

프리드리히 광장 (Friedrichsplatz)

Wasserturm에서 내려다본 Friedrichsplatz

Wasserturm은 만하임 중심지 프리드리히 광장( Friedrichsplatz)의 중심에 자리하고  주변에는 공원, 조각상, 갤러리, 공연장,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이다.

 예수회 가톨릭 교회 (Jesuitenkirche)

성당 측면 벽의 Mozart 의 미사 참석을 알리는 기념판


모차르트가 만하임 체류 시 미사에 참석했던 곳으로  유명해진 Jesuitenkirche는 만하임 대학 근처의 성당으로  18세기 초에 예수회 수도원으로 설립되었다. 이후에는 현재의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Jesuitenkirche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세련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녹색과 보라색으로 어우러진 내부의 아름다운 천장 장식과 프레스코 화는 볼만한  독일여행코스추천명소이다. Jesuitenkirche는 현재도 종교 행사와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모차르트는 1763년 7월에 부모님과  만하임으로 처음 여행했고 1777년과 1778년에는 5개월 동안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에 머물면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되었고,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176일밖에 살지 않았지만, 이 도시는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그는 당대 최고의  유명한 '만하임 음악 학교'의 뛰어난 음악가들과 친구가 되었고  16세의 가수 알로이시아 베버(Aloysia Weber)와 첫사랑에 빠진다. 또한 이곳에서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그녀의 여동생 콘스탄츠도 만났다. 1778년 3월,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는 함께  파리로 갔지만, 파리에서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1778년 늦가을에 그는 홀로 만하임으로 돌아왔다. 만하임이 그에게 위안을 주었음을 당시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로 썼다. 

"내가 만하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만하임도 나를 사랑한다"라고. 

 

추가 정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년 1월 27일~1791년 12월 5일)는 현재의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령이었을 당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로 잘 알려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과 지휘를 배웠다. 그는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오늘날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널리 존경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이시아"와  그의  아내가 된 "콘스탄츠"  ,  베버(Weber) 가의  자매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한 알로이시아 베버(Aloysia Weber) 정확한 생년월일은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1759년에서 1761년 사이에 프란츠 프리돌린 베버와 마리아 세실리아 코둘라 스템의 딸로  태어났다. 1763년 그녀는 가족과 함께 만하임으로 이사했다. 그녀가 1777년 만하임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이미 가수로써 좋은 교육을 받았고 미래가 유망했다. 모차르트는 그녀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가르치고, 사랑에 빠졌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그녀와  함께 콘서트 여행을 다녔고 1778년 12월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한다.

이후에도 음악가 집안인  베버(Weber) 일가와 모차르트의 친분은 계속 이어졌고  1781년 비엔나로 이사 온 모차르트는 몇 달 동안 베버의 집에서 살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후에 알로이시아의 여동생 콘스탄츠와 결혼했다. 모차르트와 결혼기간 중 콘스탄츠는 8년 동안 여섯 번이나 임신했는데,  그녀는 너무 허약해져서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6명의 자녀 중  4명이 유아로 사망했다. 
1791년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츠는  남편의 빚과  아이들의 양육을 떠맡게 되었다. 그녀와  알로이시아는 모차르트의 작품들과 함께 콘서트 투어를 조직했고 그녀는 모차르트의 남아있는 유작을 즉시 팔지는 않았지만 1799/1800년 초에 오펜바흐 음악 출판사 요한 안톤 안드레에게 팔았다. 콘스탄츠는 1810년 덴마크인 비서이자 외교관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닛센과 재혼한다. 이 커플은 1820년과 1824년 사이에 독일을 여행했고 1824년 8월에 잘츠부르크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모차르트의 전기 집필을 시작했고  콘스탄츠는 1828년에 모차르트 전기를 출판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Baden-Württemberg)의 유래 

 

바덴 (Baden)의 역사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제국은 1세기에 이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포함시켰다. 로마의 통치 시기 동안, 바덴은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로마 시대의 유적과 건축물이 남아있다.
중세 시대에는 바덴은 황제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국경의 중심지로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중세 시대 동안 바덴은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며, 여러 지배자들과 국가들 사이에서 파편화되었다. 1803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독립성을 상실한 후 바덴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며, 프랑스 정부 아래에서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의 패배 후, 바덴은 독일 연방의 일부로 되살아나고 19세기에는 바덴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났으며, 철강, 섬유, 기계 등 다양한 산업이 발전했다. 또한 바덴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유명했다. 유명한 대학과 문화적 장소가 바덴에 위치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국가적 변화와 함께 바덴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일부로 통합되었고 독일 통일 이후, 바덴은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 주로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역사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로마의 유적과 건축물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뷔르템베르크는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였다. 9세기에 뷔르템베르크 왕국이 성립되었고, 11세기에는 국가적인 독립성을 인정받았다. 이후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발전하며 국가 영토를 확장시켰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는 하프텐부르크 가문이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통치했고 이 가문은 지속적인 확장 정책을 추진하고, 경제와 교육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특히, 하프텐부르크 가문은 뷔르템베르크 주요 도시인 슈투트가르트를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인해 뷔르템베르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패배 후, 뷔르템베르크는 독립성을 되찾고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19세기에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이 현대화를 추진하였고, 산업화와 철도 네트워크의 개발 등이 이루어졌다. 뷔르템베르크는 1871년 독일 제2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경제와 인프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뷔르템베르크에서는 자동차 제조업체인 메르세데스-벤츠가 설립되었고, 슈투트가르트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뷔르템베르크는 바덴과 함께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일부로 통합되었고 독일 통일 이후, 뷔르템베르크주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일부 주로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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